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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록/집

나의 가장 비싼 집

배로 2020. 9. 27. 23:14

0. 자기소개

안녕하세요, 30대 1인 가구 직장인 배로입니다.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재택근무로 일도 집에서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. 어지러운 시국에 만족스럽다는 표현은 조금 무례한가요?

1. 이 집을 고르게 된 계기

이 집은 내가 평생 살면서 구매해본 것 중에 가장 비싼 것이다. 그런데도 정말 별 생각 없이 구입을 결정했었다.
부모님이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오신 날이었는데 우연히 아파트 얘기를 하게 되었고, 같이 부동산에 방문했다가 한 군데 집을 5-10분 정도 구경한 다음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. 계약을 결정하고 나서야 대출 가능액과 나의 동원 가능한 자금을 부랴부랴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. 다른 집들은 구경도 하지 않았고 그 당시 신고가로 계약했었다. 그 때 잠깐 미쳤던 거 아닐까? 내가 종종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충동적으로 구는 경우가 있는데 집 계약이 대표적인 예시였던 것 같다.

2. 장점

동네가 조용하다. 항상 번화가 주변에 살다보니 처음에는 너무 조용해서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번화가로 가면 시끄럽고 밝아서 못 살 것 같다.
공원이 가깝다. 전에는 공원을 가로질러서 출퇴근을 했었는데 회사 일이 힘들었던 시기에 공원을 오가는 시간이 많은 위안이 됐던 것 같다. 요즘은 집에서 일할 때 창문을 열고 있으면 새 소리가 들린다.

3. 단점

층간 소음이 심하다. 오래된 아파트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윗집 가족이 정말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운다. 노부부가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젊은 자녀들과 싸우는 소리도 들린다. 모두를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이혼을 하든 분가를 하든 둘 다 하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.

4. 집에서 대체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

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집에서 한다. 요리, 식사, 업무, 운동, 게임.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은 집안일이다. 집이 커지니까 청소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.

5. 집의 규칙

특별한 규칙은 없고 '씻고 잠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면 침실에 들어갈 수 없다' 정도가 유일한 규칙인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최근에 몇 개 만들었다. 아래의 규칙들은 앱으로 관리하고 있다. 안타깝게도 현재 화장실 청소와 세탁기 청소가 밀려있는 상태다.

  • 화장실 청소 1회/주
  • 바닥 청소 2회/주
  • 이불 빨래 1회/2주
  • 세탁기 청소 1회/2주


6. 기존 집과 다른 점

10년 넘게 임차인으로 살았다. 거의 매 해 이사다닐 집을 고르고 계약하고 이사를 해왔다. 내가 고른 적 없는 장판과 벽지가 발라진 집에서 오래된 가구와 가전들만 사용하면서 살았다.
이 집의 장판과 벽지는 물론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내가 선택한 것이다.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고른 것이고 모든 물건들의 히스토리가 명확하다.
물론 아무도 나를 이 집에서 쫓아낼 수 없다는 것도 기존 집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. 애초에 집을 사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.

7.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

침실.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. 진짜 세상에서 제일 좋다. 얼마나 좋냐면 방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.
암막커튼이 있어서 몇 시까지든 잘 수 있고, 큰 침대에서 굴러다니면서 자는게 내 평생의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.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공간이다.

8. 집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곳

인테리어 하자가 발생한 곳들. 특정한 공간은 아니고 온 집안 곳곳에 발생해있다. 특히 실리콘 작업을 어찌나 지저분하게 해놨는지 종종 눈에 띌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. 제일 좋아하는 공간인 침실 샷시에도 하자가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.
마음에 안 든다기 보다는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막막한 공간은 작은 방이다. 이사 온지 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작은 방에서 하는 일이 딱히 없다.

9. 제일 좋아하는 물건

이 집에 오면서 갖게된 것들이 많아서 좋아하는 물건이 많은데... 꼭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욕조로 하겠다. 큰 침대와 더불어 꼭 갖고 싶었던 것 중 하나다. 화장실이 작아서 욕조를 빼고 샤워부스로 대체하면 어떠냐는 권유도 있었지만 욕조를 넣은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. 힘든 날 뜨거운 물 속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면 이 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싶다.

10. 가장 최근에 산 물건

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가전은 건조기다. 정말 갖고싶었던 가전인데 가격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올 해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에 구입했다. 작년 여름에 이불을 빨았다가 마른 것도 안 마른 것도 아닌 상태에서 멈춰있었던 경험이 구매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. 비싸서 카드 값이 나갈 때 마음이 아팠지만 익히 들어왔던 명성에 걸맞는 만족도를 안겨주고 있다. 필터 청소가 조금 귀찮지만 오래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씻어주고 있다.

11. 가장 오래된 물건

밥그릇, 국그릇, 숟가락, 젓가락이 가장 오래된 것 같다.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엄마가 본가에서 쓰던 것들을 보내줘서 지금까지 10년 넘게 쓰고 있다. 접시 중 하나는 깨먹었지만 그 외에는 엄마가 보내줬던 것들 그대로 사용 중이다.

12. 살아본 집 중에서 이 집은 몇 등

단연 1등이다. 2등은 생각도 안 날 만큼의 큰 격차로 1등이다. 그런데 다음에 더 좋은 집으로 간다고 해도 지금 집은 종종 생각날 것 같다. 물리적인 집 보다도 처음 자금을 마련할 때의 어리버리함, 인테리어를 진행하면서 겪었던 각종 고생, 집 값이 떨어질까봐 걱정했던 날들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.

13. 다음 집은 어떤 집

아래의 조건을 갖춘 30평대 신축 아파트로 가고 싶다.

  • 음식물 쓰레기를 갈아서 버리는 배관이 별도로 시공되어있는 곳
  • 층간소음이 없는 곳
  • 걸어갈 수 있는 공원이 있는 곳
  • 번화가와 적당한 거리가 있는 곳
  • 주방이 큰 곳


14. 인터뷰 소감

나이 치고 집을 꽤 일찍 산 편이라 사람들에게 집 자랑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. 집 얘기가 나오면 주로 겸손을 떨면서 집의 부족한 점과 대출 상환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곤 했거든요. 최대한 좋게 얘기해봤자 '그래도 요즘 집값 오르는걸 보면 사놓길 잘 한 것 같긴 해요' 정도?
그런데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마음껏 집에 대해 떠들다 보니 내 집에 대한 나의 사랑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. '침실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'니 정말 웃기지만 사실입니다. 지금도 침실을 떠올리면 가슴 속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벅차올라요. 이 집에 와서 내가 이렇게 행복했는데 그걸 이제야 확인한 점은 아쉽지만 매일 함께하는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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